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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병원 역사관

인제대학교 백병원은 변화와 혁신을 통해 ‘백병원 100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설립자 소개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 박사를 소개해드립니다.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과의사들을 많이 배출하여 우리나라 외과학의 기반을 다진 백인제 박사는 1899년 1월 28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에 진학하여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의전 재학시절 가장 나이가 어린 축임에도 리더 구실을 하였으며, 또 학업에 정진하여수석의 자리를 내내 놓치지 않았다.

소년시절의 백인제 (왼쪽)
청년시절의 백인제 (오른쪽 끝)
1928년 6월 1일 경의전 외과
주임교수 임용 직후의 백인제
1941년 경의전 졸업앨범에
실린 백인제 사진
백인제 박사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에 입학, 1921년 수석졸업 했다.
사진은 동아일보 1921년 3월 23일자에 게재된 백인제 박사 수석졸업 관련 기사이다.

백인제 박사와 독립운동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재학시절(1919년) 3ㆍ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일제에 체포되어 8개월여 동안 고초를 겪었다. 백인제는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3ㆍ1운동에 단독으로 참여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의 독립을 희망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9년 3월 27일 학생들에게 선처를 바라는 뜻으로 종로경찰서에 성행조(性行調)를 제출했다. 백인제에 대해서는 “명석한 노력가로 항상 우수한 성적을 얻어 현재 본교 특대생이며 아무런 결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1919년 11월 6일 최종판결에서 백인제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에 처해졌다. 백인제는 1919년 3월 4일 체포되었으므로 이미 8개월 이상 형을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에는 백인제 외에도 72명이 포함되었다.

백인제는 3ㆍ1운동으로 퇴학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경의전 시절에 부단한 노력과 우에무라와 사토 등 일본인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의사로 대성하는 기초를 닦았다. 백인제는 1920년 복학하여 수석으로 졸업을 했음에도 3ㆍ1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해 총독부의원에 근무하며 2년 동안 마취과 일을 맡으면 의사면허를 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백인제는 이 2년 동안의 ‘집행유예’ 기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그 결과 뛰어난 마취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으며 이때 익힌 탁월한 마취솜씨가 외과의사로 대성하게 된 데 기여할 수 있었다.

1928년 3월 12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의학박사 백인제 박사

백인제 박사는 논문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를 도쿄제국대학 의학부에 제출하여 1928년 4월 6일 의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약관 스물아홉의 나이에 1928년 6월 1일자로 모교의 외과 주임교수가 되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곱번째로 나온 의학박사이며, 일제시대 내내 경의전의 주임교수가 된 사람은 백인제 이외에 유일준이있을 뿐이었다.

1937년 장폐색증에 있어서 상부장관 감압술이 유효한 수술임을 세계 최초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계학회에서는 1940년 미국의 왕켄스틴이 먼저 보고하였다. 사진은 이를 애석하게 여긴 백인제 박사의 일본인 제자들이 그의 발표내용을 그림을 그려 보내준 것이다. 현재는 부산백병원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인 제자들이 발표내용을 그린 그림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백인제에 대해서 물으면 거의 예외없이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 또는 ‘도구계의 일인자’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외과는 기본적으로 손을 놀려서 하는 의술인데, 백인제의 섬세한 손놀림은 모든 사람의 찬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과와 관련되는 과학지식을 자기 것으로 하는 노력을 부단히 하였고 또 과학정신을 체득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속의 서울의대> ‘외과학의 개척자-백인제’에서 발췌

백인제 박사의 임상강의 모습. 한국인 학생은 물론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진단의 정확함과 대담하고도 정확한 수술, 그리고 명쾌한 강의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백인제 박사는 수혈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근대 수혈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백인제 박사의 수혈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번째 연구인 「일본ㆍ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속별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를 1922년 12월 <조선의학회지> 제40호에 발표하는 등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子)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협회를 외과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1954년 초 백병원이 민간병원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의 바탕이 되었다.

1941년 경의전 졸업앨범에 수록된 백인제 박사 임상강의 사진
백인제 박사 임상강의 사진 (1930년대 추정)

또한 백인제 박사는

수혈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 근대 수혈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실은 백인제 박사의 수혈연구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번째 연구인 「일본·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속별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를 1922년 12월 <조선의학회지> 제40호에 발표하는 등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子)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협회를 외과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1954년 초 백병원이 민간병원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의 바탕이 되었다.

병원 경영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의료혜택을 넓히고 의료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백인제 박사는 1936년 11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의학연구차 유럽과 미국을 시찰하던 중 미국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하고, 미국의 의학이 유럽에 비해 실험과 연구에서 뒤떨어진 반면, 임상기술은 더 발달한 것을 발견했다. 메이요 클리닉은 시골마을에 있던 사립병원으로 1889년에 개원한 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 명문병원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다른 병원과는 달리 일찍부터 외래진료를 중심으로 하고 특별한 때만 입원을 시키는, 당시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진료방법을 취하였다. 시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환자에게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규모의 시설 구비, 임상과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연구환경 조성, 환자의 재정적 여건을 고려한 의료수가 책정 등 식민지 의료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매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1938년 1월 16일자 조선일보
'백인제 박사 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소식 보도.

백인제 박사는 두차례에 걸쳐 구미 의학계를 시찰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메이요 클리닉과 같은 훌륭한 의료기관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1938년 1월 15일 동아일보
흥사단원들과 1936년 노량진 용봉정에서 야유회를 갖고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2열 중앙의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3열 왼쪽부터 백인제, 주요한, 유기준, 이상준, 유상규, 최경진(백인제 부인)

백인제 박사의 백병원 운영과 증축

백인제 박사가 직접 병원 경영에 나선 후 환자들이 몰려 입원실이 크게 부족하자 1942년 수술실 및 진찰실이 있던 자리에 증축공사를 해 수술실 및 외래, 그리고 병실 7개를 증축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수료 모습
일본인 간호사 마루따의 귀국의 기념하여 수술실과 진찰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앞줄 가운데가 마루따 간호사, 양쪽에 백인제 박사와 최경진 여사. 수술실과 진료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백인제 박사 왼쪽에 돌양이 보인다. 돌양(石羊)은 병원 창립을 기념하여 백인제 박사가 구해온 것으로 양쪽에 두마리가 있었는 현재는 해운대백병원에 있다.
증축공사 중 사진
1942년 증축공사를 마치고 완공된 백병원 본관 모습

재단법인 백병원 설립

백인제 박사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높은 뜻으로 그동안 병원 운영을 통해 마련한 전 재산을 기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했다. 설립 당시 이사는 백인제, 김희규, 백붕제, 박병래, 기용숙 박사가 선임되었으며, 감사는 공병우, 백기호 박사가 선임되었다. 정관에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 아래 인술(仁術)로써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 연구와 교육, 특히 교육을 통해서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19세시 말에서 20세기 초에 철강으로 재벌이 된 카네기가 미국 최초로 부를 사회에 환원, 카네기재단을 설립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한 국민의 교육, 문화, 복지(카네기재단, 카네기 멜론 대학 설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후에 록펠러, 포드 등 여러 재벌들이 이를 본받음으로써 미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꽃을 피워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도 미국의 카네기재단에 필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여러 변수들이 잠복해 있는 당시의 복잡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1947년 1월 1일 경향신문.
'백인제병원을 재단법인으로 한다'는 보도기사.
'외과의술계의 권위 백린제 박사가 경영하는 서울 저동2가 백병원은 이번에 1천3백56만원 재단법인으로 개조하는 동시에 의학연구기관설치, 의학연구 장학금 제도설정 등 여러가지 사업으로 재출발을 하기로 되었다한다.'